당장이라도 판 깰 것 같은 벼랑끝 전술
유리한 조건 만들기 위한 으름장일수도

애플의 선급금 유혹은 달콤하다. 2~3년 뒤 구매 의사를 근거로 조단위 현금을 이자 없이 선사할 회사가 애플 말고 또 있을까.  

물론 이자가 없다는 게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애플과의 공급계약이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지난 2014년 파산한 사파이어글래스 제조업체 GT어드밴스트테크놀러지(이하 GT)가 대표적이다. GT는 애플에 아이폰용 사파이어글래스를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선급금 5억7800만달러(약 6500억원)를 수령했다.

GT가 생산한 사파이어글래스. GT는 애플로부터 선급금을 받고 생산라인에 투자했으나, 품질 기준을 맞추지 못해 결국 파산했다. /사진=GT
GT가 생산한 사파이어글래스. GT는 애플로부터 선급금을 받고 생산라인에 투자했으나, 품질 기준을 맞추지 못해 결국 파산했다. /사진=GT

당시만 해도 GT는 아이폰 전 모델에 사파이어글래스를 공급할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결과는 1년 만에 회사를 접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업계는 애플이 GT에 달성 불가능한 품질 목표를 강요했다고 말한다. 

“고순도 알루미나를 녹여 투명한 사파이어를 성장시키다 보면 크고 작은 기포가 끼기 마련입니다. 이걸 기포 크기에 따라 어디까지 불량으로 볼 것이냐가 관건인데, 애플은 이 기준이 너무 높았던거죠.”

국내 한 사파이어 잉곳(ingot) 제조업체 전직 CTO(최고기술책임자)의 설명이다. 선급금에 회사 자금을 얹어 투자한 사파이어 생산라인은 모조리 빚으로 돌아와 회사를 파산으로 내몰았다.

LG디스플레이 역시 애플 선급금을 받고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LG디스플레이는 2009년 애플 덕에 자금 부담을 덜고 스마트폰용 LCD 생산라인을 꾸렸다. 2009년부터 3년간 애플서 수령한 선급금만 1조원이 넘는다. 

“‘트리플H(하현회 부회장, 당시 LG디스플레이 모바일사업부장)’가 애플과 협상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지만 결과까지 좋지는 못했어요. 모바일 LCD는 매출만 높았지 거의 수익은 나지 않았으니까요. TV에서 벌어 모바일에서 까먹는다는 원성도 샀습니다.”

LG디스플레이 기획실 출신의 술회다. 애플 전용라인은 일감이 없어도 다른 회사 제품을 대체 생산하지 못한다. 계약상 그렇다. 설비가 깔리고 나면 가동률은 전적으로 애플 의지에 좌우된다. 따라서 단가 협상에서 늘 수세다.

2015년 삼성디스플레이와 애플간 전용 OLED 라인 구축 협상에는 당시의 학습효과가 반영됐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애플 전용 라인을 구축하면서 선급금을 받지 않았다. 최소 14조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투자금은 전액 삼성디스플레이가 부담했다.

대신 가동률이 일정 이하로 떨어지면 애플이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조항을 달았다. 삼성디스플레이가 2019년⋅2020년 연속 애플로부터 1조원이 넘는 보상금을 수령한 단서다. 그래도 애플 전용라인 구축을 위해 삼성디스플레이가 들인 돈에는 크게 못미친다.

애플이 소위 ‘애플 카’ 생산을 위해 차 업체들과 협상을 진행 중이다. 기아차가 4조원 안팎의 선급금을 수령할 계획이라는 기사가 나오더니, 애플이 NDA(비밀유지조항) 파기를 이유로 협상을 중단했다는 뉴스가 연이어 나왔다.

안석현 콘텐츠 팀장(기자).
안석현 콘텐츠 팀장(기자).

애플은 지금 자동차 회사를 길들이고 있다. 애플은 장기 공급계약 직전에 벼랑끝 전술을 종종 구사했다. 2017년 가을 대규모 OLED를 공급해 줄 수 있을 회사가 삼성 외에 대안이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2015년 연말까지도 협상 중단 으름장을 여러번 놨다. 당장이라도 판을 깰 것 같은 태도로 조금 더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 내는 게 애플의 방식이다. 

물론 기아차보다 더 좋은 차를 만드는 회사는 많다. 그러나 기아차 정도의 가격으로 완성도 높은 자동차를 출고하는 회사는 많지 않다. ‘한 지붕 두 브랜드’라는 다소 애매한 기아차의 처지도 ‘언더 독’을 선호하는 애플 입맛에 맞아 떨어진다. 더군다나 기아차는 현대차와 함께 ‘E-GMP’라는 전기차 플랫폼도 공유하고 있다. 기아차가 이번 협상에서 결코 수세는 아니라는 뜻이다.

앞서 삼성⋅LG디스플레이 사례에서 보듯, 애플과의 협상은 도장 찍기 직전이 가장 중요하다. 최대한 많은 단서 조항을 추가해야 뒤탈나지 않는다. 그게 국내 부품 업계가 애플에 길들여진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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