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재계 접촉 나선 통상전문가 김종훈 의장
SK이노, ITC 절차 무시하고 40년 공무 경력 김 의장 인맥에 기대나

SK이노베이션 조지아주 배터리 생산 공장 건설 전경. /사진=SK이노베이션
SK이노베이션 조지아주 배터리 생산 공장 건설 전경. /사진=SK이노베이션

# 김종훈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이 미디어에 얼굴을 비춘 건 오랜만이다. 김 의장은 2006년 한미 FTA 수석대표로 전국민에게 얼굴을 알린 후 2007년부터 약 5년여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산하)를 이끌었다. 그는 국회의원으로 19대 국회에 입성했으나 2016년 재선에 실패, 이듬해  SK이노베이션 사외이사로 임명됐다. 2019년부터는 이사회 의장직을 유지 중이다. 

LG-SK 배터리 소송전이 바이든 대통령의 마지막 거부권 행사를 앞둔 시점에서 그의 등장은 익숙하면서 생경하다. 익숙한 것은 그가 오랜 기간 외교통상 전문가로서 외국의 수장 및 정부 관계자들에게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다소 낯선 이유는 그가 이번에는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SK이노베이션이라는 사기업 이사회의 대표로서 나섰기 때문이다. 

사실상 SK이노베이션이 미국 정가에 거부권 여론 조성을 위해 김종훈이라는 대한민국 통상 ‘검투사(김 의장 별명)’를 내세운 셈이다.

업계에 따르면 김 의장은 워싱턴DC와 조지아주를 찾아 정재계 관계자들에게 ITC 최종 결정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 행사 필요성을 어필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현지 무역통상 전문매체인 '인사이드 US 트레이드'와의 인터뷰에서 김 의장은 "ITC 판결을 뒤집지 않으면 미국은 수십억달러의 투자금을 잃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 다음달 11일로 다가온 거부권 행사 시한을 앞두고 SK이노베이션 측이 소송전에 막판 총력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10일 사외이사 전원이 참석한 확대 감사위원회를 개최하고 "미국에서 배터리 사업을 지속할 의미가 없거나, 사업 경쟁력을 현격히 낮추는 수준의 요구 조건을 수용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LG에너지솔루션 측과의 합의가 어렵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김종훈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 /사진=SK이노베이션
김종훈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 /사진=SK이노베이션

SK이노베이션이 김종훈 의장까지 대동해 미 행정부 압박에 나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지난 2년여 가까이 진행된 ITC 조사에서 밝혀진 SK이노베이션의 소송 대응 행태를 고려하면 김 의장의 미국행에 대한 뒷맛이 개운치만은 않다. 김 의장의 미국행이 소송 결과에 대한 정당한 불복 행위인지, 그저 국내 최고 통상전문가의 40년 공무 경력으로 쌓은 인맥에 기대려는 안일한 시도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달 초 ITC가 공개한 100여장 분량의 최종 결정문 내용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ITC의 불공정 무역 행위 조사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았다. 특히, ITC는 최종 결정문에서 SK가 악의적 의도를 가지고 전사적 차원의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고 결론내렸다. LG에너지솔루션의 조사 요청 이후 SK이노베이션 배터리 담당 팀으로 전해졌다는 LG 측 관련 스프레드시트의 문서의 제목까지 적시된 것으로 보아 ITC 자료의 신빙성은 꽤 높아 보인다. 

 

# 현행 '공직자윤리법' 상 국회의원, 장관급 정무직 등을 포함하는 고위 공직자는 퇴직 후 3년 내 유관 기관 및 기업에 취업하지 못한다. 다만, 각 부처에 설치된 윤리심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경우라면 취업이 가능하다. 

김 의장이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낸지는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19대 국회 또한 2016년 마무리됐으니 김 의장에게 공무 정보를 사적으로 유용한 부정함의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 통상 분야 최고의 전문가, 거기다 당시 1년 넘게 지속된 한미FTA 협상을 실무에서 지휘한 그가 ITC 조사에 대한 SK이노베이션의 비협조적 태도를 내내 묵인한 것은 안타깝다. CEO(최고경영자)를 포함한 경영진 견제와 감시는 이사회의 핵심 기능이다.

만약 SK이노베이션이 ITC 조사 결과에 성실하게 임해 패했더라면 김 의장의 미국행이 절차적, 도의적 정당성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SK이노베이션은 문서 파기가 정기적인 관행이라 주장하고, ITC의 수입 금지 조치 판결 또한 SK이노베이션이 미국의 사법 절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것이라며 문제를 축소시키고 있다.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는 이같은 SK이노베이션 측의 일관된 해명과 금번 김 의장의 워싱턴 정가 접촉 활동 사이에는 너무 큰 괴리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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