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發 세금 전쟁 시작됐다

 

미국 정부가 한국 등 약 140개국에 다국적 기업의 법인세를 실제 매출이 발생한 국가에서 거두자고 제안했다. 또 미국은 글로벌 법인세율에도 하한선(21%)을 두자고 요구했다. 표면적으로는 조세피난처 또는 세율이 낮은 국가에 지역 본사를 두거나 무형 자산을 몰아줘 세금을 적게 내는 기업 관행에 제동을 걸겠다는 취지지만, 세계 각국의 세금 확보전이 본격화할 것이란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이같은 제안이 현실화할 경우 미국‧유럽(EU) 등지의 수출 비중이 큰 국내 대기업들에게는 작지 않은 파장이 예상돼 향후 논의 방향이 주목된다. 

지난 9일 블룸버그통신 등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미국 행정부는 8일(현지시간) 다국적 기업 중 최대 100개에 이 같은 글로벌 법인세를 적용하는 방안을 담은 공문을 약 140개국에 전달했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도하는 ‘국가 간 소득 이전을 통한 세원 잠식(BEPS)’ 대응 협의체에 139개국이 참여하고 있는데, 미국이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 여론전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들 국가는 글로벌 법인세와 정보기술(IT) 대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디지털세를 두고 논의해왔다. 지금까지 미국은 프랑스‧이탈리아‧영국 등이 자국 정보기술(IT) 기업인 구글‧페이스북‧아마존 등을 대상으로 일명 디지털세를 부과하거나 검토에 나서자 강력한 통상 보복을 경고해왔다.

이번 제안은 디지털세를 둘러싼 분쟁을 비 IT산업으로 확대해 타협점을 찾는 동시에 코로나19로 인한 세수 부족까지 해결하려는 포석으로 분석된다. 이와 관련 핵심 당사국이 모인 주요 20개국(G20)은 전날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올해 중반까지 글로벌 법인세에 관한 합의안을 도출하기로 했다. 독일과 프랑스, 국제통화기금(IMF) 등은 즉각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미국이 추진하는 이같은 글로벌 세제 개편안은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세계 각국 또한 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재정 적자가 불어났고 이를 메울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실제 IMF가 최근 발표한 ‘2021 재정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각국이 코로나19 대처를 위해 쏟아부은 재정은 16조달러(약 1경800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 결과 선진국의 평균 재정적자는 2019년 국내총생산(GDP)의 2.9%에서 11.7%로 뛰었다. 신흥국은 이 비율이 4.7%에서 9.8%로, 저소득국은 3.9%에서 5.5%로 높아졌다.

이번 미국측 제안을 좀 더 살펴보면 핵심 내용은 두 가지다. 우선 글로벌 법인세율 하한선을 설정하는 것으로 미국은 21%를 제안했다. OECD는 12.5%를 검토하고 있는데 이보다 두 배가량 높은 수준이다. 만약 아일랜드 등의 세율이 이 수준으로 높아지면 다국적기업들은 법인 설립과 유지 등의 비용을 치르면서 굳이 이 나라들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어진다. 아일랜드의 경우 OECD 회원국 평균 법인세율 23%보다 훨씬 낮은 13%에 불과하다. 21%의 하한선이 정해지면 미국이 징수할 세금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국적기업의 경우 제품이나 서비스 판매로 매출이 발생한 국가에 세금을 내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아일랜드처럼 세율이 낮은 나라나 조세 회피 지역에 설립한 법인을 이용해 법인세를 줄이고 있는 관행을 더 이상 묵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매출이 발생하는 국가가 법인세를 징수하도록 하는 방안(매출 연동 법인세)은 미국에 특히 유리하다. 소비 규모가 큰 국가들이 걷는 세금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또한 법인세율 조정이 미 의회 통과 등 국내 정치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는 반면, 이 방안은 국제사회의 합의만 있으면 비교적 간단히 시행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미국은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이 개편안의 대상이 될 기업을 매출 기준 글로벌 100대 기업 수준으로 한정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제안의 배경에는 미 행정부의 이해타산이 깔려있다. 현재 조 바이든 행정부는 4400조원이 넘는 막대한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밀어붙이고 있는데, 재원 마련을 위해 법인세 세율 인상(21%→28%)을 검토해왔다. 때문에 법인세가 인상되면 기업들의 미국 투자가 줄어들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글로벌 법인세율 하한선을 두고 실제 매출이 발생하는 국가의 과세권을 강화하면 이런 우려도 줄일 수 있는 셈이다.

미국이 이처럼 제안을 들고 나오자 우리나라로서는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법인세율이 최고 27.5%로 높은 편이어서 최저 법인세율을 별도로 조정할 필요는 없을 전망이지만, 삼성·LG·현대차 등 다국적 수출 기업들은 글로벌 법인세 부과 방식이 어떻게 확정되는지에 따라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국제적인 논의 향방을 예단하기는 어렵다는 전망도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27개 유럽 국가 사이에서도 헝가리 9%, 아일랜드 12.5%, 프랑스 32% 등 법인세율 범위가 다양한 데다 조세피난처의 저항이 예상돼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에도 다국적 기업에 과세하는 문제를 놓고 국제적 협상이 진행됐지만 합의가 도출되지 못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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